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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고의 세월들을 말없이 참고 이겨내신 어머니가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
   을 받으시던 날은 내게 있어 가장 보람있는 날이었다.
   아이를 등에 업은 채 해운대 해변을 발이 퉁퉁 붓도록 걸어다니며 장사를
   하시던 어머니, 아버지로부터의 모진 욕설과 구타 속에서도 꿋꿋이 버티시던
   어머니, 6남매를 남부끄럽지 않게 기르기 위해 동분서주하시던 어머니....
   어머니의 사랑에 조금이나마 보답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일은 내 노래
   '잃어버린 30년'이 히트를 쳤을 때였다.
   어머니는 온 가족이 모인 한자리에서 기쁨의 눈물을 펑펑 쏟으셨다.
   어머니의 삶은 기구했다. 힘겨운 인생을 살아오신 나의 어머니는
   치과의사였던 아버지 밑에서 고생이란 걸 모르고 자라셨다.
   대구 경북여고 출신인 어머니는 여고 때 배구부 주장으로 활약할 정도로
   활동적이셨다.
   어머니는 또한 노래를 잘 불러 주위로부터 많은 시선을 받아왔다.
   선천적으로 목소리를 타고나신 것 같다.

   한때 가수활동, 음반까지 냈던 어머니
   그 타고난 목소리 덕분에 어머니는 한때 가수 활동도 하셨다.
   직장생활 중 한 가요콩쿨대회에 놀러갔다가 주위의 권유에 의해 무대에
   오르셨던 것. 그 일을 계기로 어머니는 부산 MBC 전속가수가 되었고,
   곽문희라는 이름으로 가수 고대원씨와 함께 음반을 내기도 했다.
   집안의 극심한 반대로 가수활동을 그만 두게 되고 직장생활을 하던 중
   아버지를 만나셨다.
   부부간의 금실이 좋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었기에 나의 어린시절은 한 때
   남부럽지 않을만큼 유복했다. 그러나 행복한 삶도 잠시뿐, 아버지가 미군 부대
   주변 양색시들과 함께 당시 유행처럼 번졌던 마약에 손을 대셨다.
   결국 아버지는 직장을 그만두게 됐고, 어머니가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다.
   어머니는 당시 병원에서 간호과장으로 근무하고 계셨는데, 반 폐인이 돼버린
   아버지의 치료를 위해 아버지를 신경정신과에 반 강제로 입원시키셨고,
   몇 년 후 퇴원 후 술로 인해 혈압이 갑자기 높아지며 혈관이 터지고 만것이다.
   아버지는 하반신 불구가 되었고, 거동을 못하게 되자 술만 계속 마셔댔다.
   집안은 바람잘 날이 없을 정도로 늘 어수선했다.
   어머니는 그같은 고통속에서 당신 혼자 힘으로 돈을 벌어다가 남편과 6남매를
   모두 꿋꿋이 이끌어 오셨다.
   단 한번도 힘들다는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던 어머니...
   나는 정말이지 어머니를 잘 만났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삶을 더 힘겹게 만드는 아버지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곁에서 수발을 들어주셨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순수했고 인간미가 있는 분이셨다.
   나는 그러한 나의 어머니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어머니는 정말이지 노래를 잘 하셨다. 어머니가 노래를 계속하셨더라면
   아마도 우리 가요사에 커다란 획을 그으셨을 것이다. 힘겨운 삶이었지만
   초등학교 시절부터 가수를 꿈꾸던 나에게 어머니는 "예전에 엄마의 꿈이
   가수였는데, 네가 나를 꼭 닮아 노래를 아주 잘 하는구나.
   열심히 노력해서 엄마의 못다 한 꿈을 꼭 이뤄달라"고 격려해 주셨다.
   그 말씀이 항상 뇌리를 떠나지 않아 나는 더더욱 열심히 노래 연습을
   했다.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와 주유소, 청과물상회, 김밥공장 등을
   전전하기도 했다. 그러한 나에게 어머니가 과거에 당신과 함께 음반을
   낸 일이 있던 고대원 선생님을 찾아가 보라고 했다.
   그분의 도움으로 남영동의 한 업소에서 첫무대에 설 수 있었다.
   그러나 한달 만에 업소는 부도가 났고, 부산 집은 사기를 당해 풍지박산이
   날 지경이었다.모든 것을 뒤로하고 집으로 내려갔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 후 다시 서울로 올라와 업소와 극장에서 노래를 하던 중 지금의
   나를 만든 은인 안태섭 선생님을 만났다.
   5년간 그 분의 집에 머물며 피아노와 작곡 공부도 하고 노래 연습을 계속한
   나의 기량으로 82년 KBS 신인탄생 프로를 통해 5주 연속 우승을 차지했고,
   83년 6월 KBS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에서 나의 노래 '잃어버린 30년'이 방송을
   타면서 나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야말로 '자고 일어났더니' 스타가 됐던 것이다.
   그 이후 '원점','나침반','마음이 울적해서', '다함께 차차차'를 내기까지
   10대 가수에 선정되는 등 상복이 터졌다.
   이러한 과정에서 어머니는 줄곧 나의 스승이자 든든한 후원자가 돼 주셨다.
   어머니는 항상 내가 출연하는 방송을 보시며 모니터를 해 주셨다.
   내가 힘겨운 나날들을 딛고 인기를 얻은 것도, 슬럼프에 빠졌다가 재기한 것도,
   그리고 대표적인 트로트 가수의 하나로 자리매김한 것도 다 어머니의 정신적인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시고 다리가 퉁퉁부어
   고생하시던 어머니는 모든 고통을 자식들을 위해 묵묵히 이겨내셨다.
   요즘은 어머니를 뵈면 안쓰럽기만 하다.
   날씨가 안좋으면 온몸이 쑤시고, 가끔씩 혼자 외로워하시는 모습을 볼 때면
   더더욱 그러하다.

   어머니는 불우한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도우며 앞으로 남은 시간을 채워
   가는 것이 어머니의 작은 소망이다.
   어머니의 삶을 보면 '인생은 공수래 공수거'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렇게 모진 고생을 하셨지만 벌어 놓은 돈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이에 대해 어머니나 나나 조금도 아쉬워하지 않는다.
   돈보다는 꿈과 희망과 사랑이 더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평소 "유명 스타가 되기 전에 먼저 인간이 돼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때문에 어머니는 '노래 잘하는 가수 설운도'라는 말보다는 '인간적인 설운도'
   라는 얘기를 더 좋아하신다. 나는 어머니의 깊은 뜻을 헤아려서 이웃을
   사랑하려 노력한다. 노래만 하는 가수가 아니라 이웃의 정과 작은
   인생을 얘기하고, 문화 예술인으로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들을 꾸준히
   실천해나가고자 한다.
   여기서 나는 잠시 나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이고 싶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이 자칫 나의 아버지에 대한 지나친 편견을 가지게 될까봐
   걱정이 돼서이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많이 고생시킨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나의 아버지는 본시 티없이 맑고 순수하고 따뜻한 분이셨다.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셨고, 꽃에서 새순이 돋는 것을 보며
   기뻐할 줄 아는 그런 분이셨다. 다만 자신의 꿈과 욕망이 좌절되면서
   아픔을 술로 다스리며 괴로워하셨던 것이다.
   나의 아버지는 한마디로 '좋은 아버지'이셨다.
   어머니는 지금도 내 주변에서 보이지 않는 커다란 '마음의 지주'가 돼주신다.
   오래오래 사시면서 이 불효자의 효도를 받아주기를 기원하며
    감사와 사랑을 전하고 싶다.